- 낙찰가 19억5000만원…‘의기’ 정신의 가치 값매기기 어려워
서울옥션의 지난해말 마지막 경매에서 글씨로는 역대 최고가인 19억5000만원에 낙찰된 작품이 나왔다. 일본의 개인소장자가 소유하던 것으로 그간 국내 학계에조차 알려지지 않은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유묵(遺墨)이었다.
'龍虎之雄勢 豈作蚓猫之態(용호지웅세 기작인묘지태)'라는 글씨로 '용과 호랑이 같은 영웅적 기세로서 어찌 지렁이나 고양이 같은 모습을 하겠는가'라는 뜻이다.
사형 집행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이 쓴 글씨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거침이 없고 힘찬 필치가 돋보인다. '호랑이는 굶주려도 풀을 뜯지않고, 영웅은 어떠한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는다'는 속뜻을 안 의사 나름대로의 의기 충만함을 표현한 글이며 필체다.
안 의사는 사형을 선고받은 1910년 2월14일부터 3월26일 순국하기 전까지 감옥에서 많은 글씨를 써서 일본인 간수 등에게 선물로 줬다. 이때 모든 협서(夾書)는 '경술년 삼월 여순 감옥에서 대한국인 안중근이 쓰다'(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라고 썼다.
그리고 낙관 대신 왼손 무명지가 잘린 손도장을 찍었다. 이는 상해 임시정부 초대 재무국장인 최재형 선생 밑에서 훈련과 지원을 받은 안 의사와 엄인섭, 우덕순 등 11명이 1909년 3월초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고 왼손 넷째 손가락인 무명지(無名指) 첫 마디를 잘라 태극기에 혈서로 '大韓獨立(대한독립)'이라 쓰고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다짐한 결과다. 그래서 안중근 의사의 글씨는 추사 글씨와 달리 위작(僞作) 시비가 없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글씨에 '香象渡河 金翅劈海(향상도하 금시벽해)'란 작품이 있다. '코끼리가 항하(恒河, 갠지즈강)를 거침없이 건너듯, 금시조(가루다)가 바닷물을 가르고 자유자재로 날듯이!'라는 뜻이다.
불교의 대승계경 중에 '우바새계경(優婆塞戒經)'이란 경전이 있다. 전 7권 28품으로 구성된 이 경은 중국의 오호십육국시대인 426년 북량(北涼)에서 500여명의 재가신자들의 요청으로 담무참(曇無讖, 385~433)이 번역했다. 경명은 비록 남성재가신자를 뜻하는 우바새가 지켜야 할 계를 모아 놓은 경전이지만, 여성신자도 대상으로 하는 재가신자 모두에게 적용되는 계경이라 할 수있다.
이 경의 1권에는 ‘如恒河水 三獸俱渡 兎馬香象 兎不至底 浮水而過 馬或至底 或不至底 象則盡底’(여항하수 삼수구도 토마향상 토부지저 부수이과 마혹지저 혹부지저 상즉진저)라는 구절이 있다.
‘갠지즈강의 물이 불어 토끼, 말, 코끼리 세 동물이 함께 건널 때 토끼는 강물 바닥에 발이 닿지 않아 강물에 떠서 건넌다. 말은 낮은 곳은 걸어서 깊은 곳은 물에 떠서 건너지만, 코끼리는 줄곧 강바닥을 걸어서 건넌다.’는 뜻이다.
세 동물이 강을 건너는 모습은 물론 깨달음의 경지를 비유한 것이다. 여기서 향상(香象)은 산스크리트어 간다스틴(Gandha-hastin)의 음역인 건타아제(乾陀訶提)의 한역(漢譯)으로 푸른 색의 큰 덩치에 향기가 나는 코끼리를 뜻한다. 불교에서는 대력금강보살 또는 호계금강보살의 상징이다. 여기에서 '향상도하(香象渡河)' 또는 '향상절류(香象截流)'란 성어가 유래한다.
금시조(金翅鳥)는 고대 인도의 전설에 등장하는 거대한 새로 산스크리트어 가루다(Garuda)의 음역인 가루라(迦樓羅)의 한역이다. 가루다의 머리와 날개는 금색이어서 금시조라 번역했다. 새들의 왕으로 성질이 사나우며 자유자재로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지기도 한다.
양 날개는 336만리나 되며 하루에 용왕 하나와 작은 용 500마리를 먹는다고 한다. 힌두교에서 가루다는 흔히 최고의 신 비슈누가 타고 다니는 동물이다. 장자의 대붕(大鵬)이 연상된다.
반면 불교에서는 용이 어느날 가루다 금시조에 잡혀 먹히게 되자 부처에게 도움을 청했다. 부처는 용에게 가사(袈裟)를 주면서 난을 피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 후에 용은 가사를 걸친 승려를 수호했다고 전해진다.
남송(南宋)의 엄우(嚴羽, ?~1245)는 '창랑시화•시평(滄浪詩話•詩評)' 27절(二七)에서 ‘李杜數公 如金翅劈海 香象渡河 下視郊島輩 直蟲吟草間耳 이두수공 여금시벽해 향상도하 하시교도배 직충음초간이)’이라고 평가했다.
‘이백과 두보 등 몇 분은 금시조가 바다를 가르듯 코끼리가 항하를 건너듯 거침없이 읊었으며, 맹교나 가도 같은 이들은 풀숲에서 벌레가 울 듯했다’는 말이다.
그후 '향상도하 금시벽해'라는 말은 불교에서 깨달음의 경지는 물론 시와 문장, 더 나아가서 서예의 '웅혼하며 힘이 있는 치밀한 필치'를 표현하는 말로 확충되었다.
우리나라 고예술품 중에서 그림은 단원 김홍도와 겸재 정선의 작품이, 도자기로는 청화백자나 큰 달항아리가 최고가로 거래된다. 글씨로는 소전 손재형, 위창 오세창, 담원 정인보는 물론 한석봉이나 추사도 안중근 의사에게는 그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10년전인 2013년 KBS1 'TV쇼 진품명품' 900회를 맞아 안 의사의 유묵인 '敬天'(경천, 하늘을 공경하며 바르게 살라)이 공개된 적이 있다. 천주교 신자인 안 의사에게는 '하느님을 공경하라'는 의미도 될 것이다. 그런데 이날 전문 감정단은 감히 가격을 매긴 수 없을만큼 귀하다며 감정가를 '0원'으로 책정했다.
이 유묵도 안 의사가 여순 감옥에서 쓴 글씨로 박삼중 스님이 90여년 동안 일본인이 가지고 있던 것을 들여와 서울옥션의 경매에 7억원에 내놨지만 유찰됐다. 이후 잠원동성당이 박삼중 스님에게서 5억원가량에 구입해 서울대구교에 기증한 것으로 지금은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에서 만나볼 수있다.
안중근 의사의 유묵은 죽음을 바로 코앞에 두고도 추호의 떨림도 없는 영웅의 자세로서 일필휘지(一筆揮之)한 글씨다. 오히려 금시조가 바다를 가르는 것보다, 코끼리가 항하를 건너는 것보다 그 정신은 웅혼하다.
개인 혹은 박물관에서 최고가로 구입했다면 이미 글씨의 예술성을 떠나 열한 글자 그 속의 정신을 높이 평가해서 일 것이다. 감히 값을 매길 수없어 0원이라고 한 것이나 최고가인 19억5000만원이나 거기에 숨어있는 속뜻은 같을 것이다. 그런 글씨를 쓴 영웅 안중근의 '정신값'으로 말이다.
이형로는 동국대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대만대학 철학연구소와 교토대학 중국철학연구소에서 수학 후 대학 등에서 강의를 했다. 현재 덕수궁에서 근무하며 스스로를 '덕수궁 궁지기'라고 부른다.저서로는 ‘궁지기가 들려주는 덕수궁 스토리’, ‘똥고집 궁지기가 들려주는 이야기’(2018년)에 이어 2019년말 '궁지기가 들려주는 꽃*나무의 별난 이야기'를 펴내기 시작해서 현재 9권을 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