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숙한 여인,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 못이루는 이유
- 지고한 사랑의 노래?, 남녀간 성애?…각자 감성대로 해석하면 될 일
덕수궁 연못의 작은 섬 한가운데에는 금방이라도 날아갈듯한 모양의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봄이 되면 이 나무를 빙둘러 호위하고 있는 철쭉이 흐드러지게 핀다. 연못은 일제강점기에 덕수궁을 공원화하면서 만든 것이라 정식명칭은 없다.
어떤 이는 덕수궁의 옛이름인 경운궁(慶運宮)에서 빌려 경운지라 하는 이들도 있다. 필자는 이런 버젓하지 못한 이름이 싫어, 5월이면 물위에 떨어지는 철쭉꽃이 서럽도록 아름다워 '낙춘지'(落春池, 봄이 떨어지는 연못)라는 이름을 붙였다.
어느 해 이맘때쯤 백련 홍련이 청초하게 피더니 이듬해는 꽃소식이 없었다. 다음해에는 하얀 수련이 청순하게 피더니 그 이듬해에는 또 꽃소식이 없었다. 낙춘지의 수심이 낮아 연꽃과 수련 뿌리가 추운 겨울을 이겨내지 못해 그런 것이다. 그러다 몇해 전부터 오이꽃을 닮은 앙증맞은 노란꽃이 피기 시작했다. 연못 한 귀퉁이에서 자라던 이 꽃은 영역을 점차 넓히더니 지금은 연못이 온통 그들의 차지가 되었다. 노랑어리연이다.
우리 주변에서 볼 수있는 연꽃 종류는 10여종이 있는데 크게 연꽃과, 수련과, 조름나물과로 나눈다. 백련•홍련은 연꽃과, 개연꽃 등은 수련과, 어리연과 노랑어리연은 조름나물과다.
이 가운데 노랑어리연은 우리나라 각지의 늪•연못•도랑에 나는 여러해살이 수초다. '어리'가 사전에는 '비슷하거나 가까운 것' 또는 '작고 앙증맞다'라는 뜻으로 설명되고 있으니 연꽃을 닮은 작은 꽃이란 의미다. 한자로 행채(荇菜 또는 莕菜)라 하며 중국과 일본에서는 금빛 연꽃이 핀다하여 금련화(金蓮花)라고도 한다. 꽃잎을 자세히 보면 마치 천 끝자락에 실이 풀려 술장식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영어이름은 Water fringe라 한다.
한여름 내내 잎겨드랑이에서 물 밖으로 나온 꽃줄기 끝에 3~4cm 크기의 노란색 꽃이 한송이씩 끊임없이 피는 노랑어리연꽃은 이른 아침에 피었다가 정오무렵이면 시들어 게으른 사람은 활짝 핀 꽃을 보기 힘들다. 노랑어리연이 중국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시경(詩經)의 첫번째를 장식하고 있는 시인 '관저關雎)'에서다.
關關雎鳩(관관저구, 꾸룩꾸룩 노래하는 저 물오리는)
在河之洲(재하지주, 황하강가 모래톱에서 서로 찾고 있습니다)
窈窕淑女(요조숙녀, 아리따운 아가씨는)
君子好逑(군자호구, 사나이의 좋은 배필)
參差荇菜(참치행채, 들쭉날쭉 피어있는 노랑어리연꽃)
左右流之(좌우류지, 이리저리 헤치며 찾아가듯이)
窈窕淑女(요조숙녀, 아리따운 아가씨를)
寤寐求之(오매구지, 자나깨나 그리워 찾아봅니다
求之不得(구지부득,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없어)
寤寐思服(오매사복, 자나깨나 애태우며 생각합니다)
悠哉悠哉(유재유재, 길고 긴 밤 잠이 안 와)
輾轉反則(전전반측, 이리저리 뒤척이며 지새웁니다)
參差荇菜(참치행채, 들쭉날쭉 피어있는 노랑어리연꽃)
左右采之(좌우채지, 이리저리 헤치다가 뜯어오듯이)
窈窕淑女(요조숙녀, 이제야 아리따운 그대 만나서)
琴瑟友之(금슬우지, 금과 슬을 뜯으며 벗이 됩니다)
參差荇菜(참치행채, 들쭉날쭉 돋아있는 노랑어리연꽃)
左右芼之(좌우모지, 이리저리 다듬어 담아두듯이)
窈窕淑女(요조숙녀, 아리따운 아가씨와)
鍾鼓樂之(종고락지, 즐거워서 종을 치고 북을 칩니다)
시의 제목인 관저(關雎, 꾸륵꾸륵 우는 물오리)는 첫구절인 관관저구(關關雎鳩)의 준말이다. 저구는 우리나라에서는 옛부터 '징경이'이라 부르던 물수리로 번역했으나, 동물학자들의 고증으로 물새의 일종인 흰배뜸부기(白腹秧鷄)로 밝혀졌다. 관관은 암수가 서로를 부르는 소리, 즉 의성어다.
행채(荇菜) 또한 '마름'이란 일년생 수초로 번역했으나 지금은 식물학자들의 고증에 의해 노랑어리연으로 확인되었다. 마름은 1년생 수초로 여름에 1cm 가량의 흰꽃이 피지만 눈에 잘 띄지 않고 그다지 아름답지도 않다. 모든 꽃은 그 나름의 아름다움을 지니고는 있다지만 시경의 첫머리를 장식할 꽃으로는 부족한 감이 있다.
서로 짝을 찾는 물오리에 자신의 처지를 비유한 것이 이 시의 기본 발상이다. 5연으로 이루어진 이 시에서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여인이란 의미의 '요조숙녀(窈窕淑女)', 사내다운 남자의 좋은 짝이란 뜻의 '군자호구(君子好逑)', 자나깨나 잊지못한다는 '오매불망(寤寐不忘)', 이리뒤척 저리뒤척 잠을 못 이룬다는 '전전반측(輾轉反側)', 부부(남녀) 사이의 화목한 정을 이르는 말인 '종고지락(鐘鼓之樂) 등의 성어가 유래한다.
전통적으로는 군자는 주나라 문왕, 요조숙녀는 문왕의 배필인 사씨(娰氏)를 가리킨다고 했으나, 이는 송명(宋明) 이후 소위 성리학자들의 틀에 갇힌 딱딱한 해석이다. 이 시는 귀족청년인 군자가 요조숙녀 배필을 찾아 짝을 이루는 내용으로 그저 일종의 결혼축하곡이다.
한편 이 시를 남녀의 성행위에 비유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1연에서 오리의 부리는 남성의 성기, 재하지주는 촉촉한 여성의 삼각지, 2연의 참치행채 좌우류지는 여성의 몸을 애무하는 모습이며, 오매구지는 요조숙녀가 침상에 누워 남성을 갈구한다는 표현으로 볼 수있다.
3연은 전희로 애만 태우고 정작 요조숙녀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자 전전반측한다는 내용. 4연은 계속된 애무로 절정에 달해 금슬(琴瑟, 작은 거문고와 큰 거문고)의 현처럼 온몸이 팽팽하게 고조된 모습. 5연은 비로소 남성과 결합하여 열락에 빠진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유가에서 주장하듯이 이 시가 주나라 문왕과 사씨와의 지고한 사랑을 노래한 것인지, 아니면 귀족 남녀간의 단순한 결혼축하곡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남녀간의 적나라한 성행위를 표현한 것인지는 여러분의 감성적인 판단에 맡긴다.
이형로는 동국대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대만대학 철학연구소와 교토대학 중국철학연구소에서 수학 후 대학 등에서 강의를 했다. 현재 덕수궁에서 근무하며 스스로를 '덕수궁 궁지기'라고 부른다.저서로는 ‘궁지기가 들려주는 덕수궁 스토리’, ‘똥고집 궁지기가 들려주는 이야기’(2018년)에 이어 2019년말 '궁지기가 들려주는 꽃*나무의 별난 이야기'를 펴내기 시작해서 현재 9권을 펴냈다. 구산스님께 받은 '영봉(0峰)'과 미당 서정주 선생께 받은 '한골', 그리고 스스로 지은 '허우적(虛又寂)'이란 별명을 쓰고 있다. |